[마음을 읽는 책장] 모든 살아남고자 하는 것들에 관하여

5000만을 지키기 위해 29만을 희생하는 일이 옳은가? 원인도 치료법도 알 수 없는 치사율 100%의 전염병이 퍼진다면 말이다. 수학적으로는 다수를 위해 소수의 희생을 감내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적으로는 29만의 조건 없는 희생을 마냥 현명한 판단이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정유정 작가의 소설 <28>(사진)은 가상의 도시 화양시가 배경이다. 인구 29만의 화양에서 개 사육장을 하던 남자가 온몸에서 피를 흘린 채 발견된다. 이 남자를 구하려 출동한 119구조대원들에게 병이 전염돼 순식간에 응급실 의사, 간호사들까지 옮는다. 이 괴질을 만나는 순간, 눈알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돌출되고 호흡곤란을 느끼며 눈은 어느새 새빨간 선지 덩어리가 된다. 폐를 비롯한 온몸에서 피가 나며 며칠 만에 차갑게 식어 죽어버린다. 전염병이 급속도로 퍼져 사람들이 줄줄이 죽어 나가자 자신도 일명 ‘빨간눈’ 보균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환자와 접촉했던 119구조대원은 집에 돌아가지도 못한다. 아내와 딸을 급히 화양시 밖으로 내보내려 하지만 국가는 사실상 계엄령에 가까운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해 도시를 봉쇄해버린다. 환자와 보균자, 비감염자가 한데 뒤엉켜 화양시는 그야말로 이성을 잃은 무간지옥으로 변해간다.

이야기는 5명의 인물과 1마리 개의 시점으로 이어진다. ‘빨간눈’은 인수공통전염병이어서 개, 돼지, 사람 가리지 않고 죽음으로 몰고 간다. 화양시는 누군가의 반려견이었던 개, 떠돌이 신세였던 개, 창고에 갇혀 끊임없이 새끼를 낳아야 했던 번식견 등 닥치는 대로 산채로 땅에 묻는다. 개가 사람을 물어 병을 옮기는 것을 막기 위함이라는 명분이었다. 땅거미가 깔리는 벌판 밑에선 개들의 비명이 들끓었다. 땅이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 같았다. 눈을 감아도 눈꺼풀 속에서는 개들이 끊임없이 떨어져 내렸다.

서로서로 경계하는 고립된 도시 속에서 물과 생필품은 순식간에 동이 나버린다. 누군가 이곳을 벗어나려 시도하면 들려오는 것은 ‘탕! 탕!’ 총소리뿐이다. 병원은 금세 환자와 시체로 가득 차 차가운 체육관으로 환자들을 쑤셔 넣는 지경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인간다움을 버리고 가장 ‘날 것’의 본능을 보인다. 무정부 도시 화양에서 사람들은 강탈, 방화, 성폭행을 일삼는다. 굶주림과 죽음에 대한 공포는 문제가 아니었다. 무정부를 틈타 평소 원한이 있던 사람들을 찾아가 죽여버리는 일도 일어난다. 법과 원칙이 사라진 도시에서 포악한 밑바닥 본성만이 살아 움직였다.

아비규환의 수라장 속에서 가장 마음이 쓰이는 등장인물은 늑대개 ‘링고’이다. 화양을 떠돌다가 유기견 구조센터 근처에서 암캐 ‘스타’를 만난다. 평생 하나의 짝만 두는 늑대의 후손답게 링고는 스타가 운명의 짝임을 감지하고 그녀를 지키기 위해 온 몸을 바친다. 의심과 분노로 가득한 인간말종의 모습들과 대조를 이룬다. 용맹한 늑대개이지만 인간 앞에서는 한 없이 약자인 ‘을’이어서 속수무책으로 죽임을 당한다. 이미 화양시가 고립된 이후에는 병에 걸렸든, 걸리지 않았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인간에게 위협이었다.

화양시민을 구제하는 대신 버리기로 한 정부가 문제일까? 살아있는 개를 산 채로 매장하는 비인간성이 문제일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힘들다면 다르게 물어보자. 당신의 목숨은 타자보다, 동물보다 더 소중한가. 당신은 다른 생명의 희생으로 얻은 삶을 죄책감 없이 살아갈 수 있겠는가. 누구도 이 질문에 또렷한 답을 할 수 없을 거로 생각한다. 살아남고자 한 것에 대해 누가 함부로 돌을 던질 수 있단 말인가.

제목 <28>은 28일 동안 화양시에서 일어난 끔찍한 사건을 의미한다. 게다가 2와 8을 더하면 0이 된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 즉 폐허가 된 화양시를 의미하기도 한다. 예상할 수도, 준비할 수도 없었던 재난을 마주한 <28>속 인간 군상은 바로 여기, 지금이기도 하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 안도했다. ‘가상의 이야기여서 다행이다’라고.

이소영/언론인, VA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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