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눈 비비고 찾아간 새벽시장, 2% 부족해 편한 곳

[더,오래] 박헌정의 원초적 놀기 본능(82)



김장을 앞두고 새벽시장에 사람이 많이 몰렸다. 추석 전에는 이것보다 다섯 배 이상 많았던 것 같다. 배추와 무가 많이 나왔다. [사진 박헌정]






우리 동네에는 새벽마다 열리는 시장이 있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앞집 아주머니께 근처에 어느 시장이 좋은지 물었더니 “남부시장, 중앙시장…” 하다가 사실 요즘은 대형마트를 이용하니까 잘 모르겠다며 전주천 둔치에 새벽마다 장이 서니 한번 가보라고 알려주었다.

새벽시장? 낯설었다. 오래전 딸랑딸랑 방울 울리던 골목의 두부 장사부터 요즘은 밤에 주문하면 새벽에 갖다 주는 온라인 배송까지 새벽은 아직 이불 속의 달콤한 온기가 식기 전에 부지런한 사람이 먼저 움직여 하루를 준비해주는 시간이다. 새벽은 공급자가 책임지는 시간이지, 소비자가 애쓸 시간이 아니다.

어느 날 새벽, 숙취로 깼는데 다시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자전거를 끌고 나섰다. 5월의 싸늘한 새벽바람을 헤치고 남부시장 옆 싸전다리에 올라서니 차양과 물건들로 울긋불긋한 노천시장이 눈에 들어온다. 여섯 시 전인데 이미 장이 붐볐다.




감자, 고구마, 당근처럼 무게 나가는 물건일수록 100g 단위로 파는 마트보다 전통시장이 저렴한 게 확실히 체감된다.






나를 비롯해 전부 등산복, 맞다. 새벽은 시니어의 시간이었다. 생선·과일 같은 것은 큰 트럭으로 옮겨온 전문상인의 물건이었고, 채소·버섯·콩·약초 같은 것은 농민이 직접 가져온 것이다. 할머니가 소일 삼아 텃밭에서 키워 뜯어온 것도 있었다.

겉으로는 전부 상인인데, 천상 근본이 농민임을 숨길 수 없는 사람도 많다. 예쁜 것을 위에 올리는 꼼수도 없고, 봉투에 잽싸게 넣어 묶어주는 능숙함도 없다. 구석 쪽으로 갈수록 더 그렇다. 새벽 첫차 타고 나와선 목 좋은 자리를 잡기 힘들었을 것이다.

물건이 마트처럼 비슷한 크기대로 가지런하지도 않고 손으로 갈겨 쓴 가격표, 또는 그마저도 없지만 밤새 이슬 맞아 펄펄 살아있는 느낌이 난다. 표고버섯 한 바구니, 마늘 반 접, 감자, 오이, 볶은 땅콩, 고추 모종을 사서 자전거 뒷선반에, 앞 바구니에, 또 손잡이에까지 주렁주렁 매달고 들어왔다.

그 후로 가끔 이 시장을 찾는다. 아예 자전거 뒤에 큰 바구니까지 달았더니 물건을 가득 싣고 돌아올 때면 분식집 사장님이 된 기분이었다. 특별히 나오는 작물이 없는 철에는 시장 규모도 쪼그라들고 명절 전에는 좌판이 끝없이 펼쳐지고 사람들로 정체가 빚어지기도 한다. 요즘은 김장철이라 배추, 무, 쪽파, 청각 같은 게 산더미다.




한눈에 보기에도 밭에서 금방 훑어온 티가 난다. 저 자리에 앉아서 다듬고 정리하다가 손님이 오면 바로 한 움큼씩 집어 판다.






이 시장은 상설시장과 오일장 장터의 중간 형태인데, 한 마디로 ‘뭐든 조금씩 부족한’ 곳이다. 요즘은 전통시장도 대부분 현대화해 지붕 씌우고 주차장, 화장실, 카트까지 갖춰 아무 때나 걱정 없이 장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장의 편의시설은 개천 건너편 공영주차장이 유일하다. 물건도 직접 가꿔 조금씩 가져온 것이라 전통 식단에서 익숙한 채소, 나물, 약초 같은 게 대부분이고 신세대가 선호하는 건 적다. 시장 상품권을 내밀면 농민은 난감해 한다. 편의성으로는 마트나 대형시장에 비할 바 아니다.

그런데 언제부터 그런 불편함 속에서 뭔가 편안함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윤을 향한 집요함과 긴장감이 덜 느껴진다. 우선 오뉴월에는 다섯 시쯤부터 붐비던 곳이, 누가 정한 것도 아닌데 요즘처럼 밤이 길어지자 자연스럽게 늦춰진다. 이달 초에는 깜깜할 때 벌벌 떨며 갔더니 그때야 물건을 내리고 있었다.




공산품이나 가공식품은 마트나 온라인몰을 주로 이용하지만 신선식품은 아무래도 눈으로 확인하고 싶고 가격 차이도 있어 가끔 새벽시장을 찾는다.






상품 구성도 변화가 심하다. 얼마 전까지 지천으로 널렸던 것이 눈 씻고 찾아봐도 감쪽같이 없을 때가 있는데, 그건 많을 때 사는 것이 가장 좋은 가격으로 가장 좋은 제철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나는 전통시장을 아주 좋아하는 건 아니다. 전통시장의 자랑인 ‘인심’, ‘정’보다 ‘정확함’, ‘표준 서비스’가 더 편하다. ‘단골’, ‘덤’ 개념도 뜨내기 손님 몫을 덜어 단골에게 더 주는 것 같은 찜찜함이 있다.

그렇지만 이 새벽시장에는 그런 판단기준이 흐려지는 뭔가가 있다. 점포 없이 맨바닥에서 사고 팔다가 해 뜨면 정말 이슬처럼 사라지기 때문인지 ‘상인은 이래야 하고, 손님은 이래야 한다’는 틀이 느슨한 것 같다. 원시의 잉여물 교환이 이러지 않았을까.

시장보다 대형마트가 편하고, 마트보다 온라인몰이 더 편하니 점점 대세가 되고 있다. 쇼핑 편의성이나 가공품 가격은 마트나 온라인몰이 경쟁력 있지만, 신선식품 가격만큼은 시장을 당할 수 없다. 나도 냉장고 채소 칸이 빌 때면 시장으로 향한다. 이 새벽시장은 중간단계마저 없으니 더 싸다. 얼마 전까지 하나에 1000 원이던 오이가 긴 놈, 짧은 놈, 구부러진 놈 합쳐 일곱 개 2000 원, 새벽잠 덜 잔 보람이 있다.




얌전하게 주인을 기다리는 개. 주인과 새벽 운동 나섰다가 들렀을 수도 있고, 묶는 기둥이 있는 걸 보면 상인이 늘 데리고 다니는 것 같기도 하다.






정부는 정책적으로 전통시장을 살리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전통은 꼭 의미만 앞세운다고 해서 지킬 수 있는 게 아니다. 구체적인 이득이 있어야 전통도 존중받는다. 전통시장의 경쟁력은 뭔가. TV리포터는 늘 ‘시장에는 인심이 있다’고 하는데, 참 모호한 말이다. 요즘 세대는 상인의 거칠고 종잡을 수 없는 응대를 인심이라 생각하지 않고, 젊은 상인 역시 손님이 막무가내로 깎거나 덤을 요구하면 무척 싫어한다.

전통시장의 경쟁력은 상인이 감수하는 고된 노동량과 낮은 인건비에서 비롯된 ‘좋은 가격’이다. 그런데 요즘은 온라인을 통해 산지에서 직송되는 상품 역시 저렴하다. 안타까운 경쟁이 불가피하다.

온라인과 거리가 먼 ‘전통 세대’가 떠나면 전통시장도 자연스럽게 없어지는 것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든다. 그렇다면 아주 아쉽고 그리울 것 같다. 전통은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우리 안에 조용하게 들어앉아 있기 때문이다.

수필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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